< 스모킹 대포가 들려주는 이야기 - 문정우의 활자의 영토 > 중에서 시사인 중에서


  특정 범죄나 사건의 진상을 설명해주는 명백한 증거를 '스모킹 건'이라고 한다. 1893년 아서 코난 도일이 쓴 셜록 홈스 시리즈물 <글로리아 스코트호>에 등장한 '연기가 올라가는 권총(smoking pistol)'이란 표현이 살짝 변형됐다. 미국에서 닉슨 대통령의 탄핵 소추가 한창 진행 중이던 1974년 7월14일 <뉴욕 타임스>칼럼에 등장해 요란하게 부활한 말이기도 하다. 이 말이 유행한 것은, 워터게이트 사건 때는 정황 증거는 많았지만 '깊은 목구멍(deep throat)'이라고 불린 내부자의 제보 외에는 결정적 한 방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이런 류의 권력형 비리 사건치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만큼 '연기 나는 총'이 많은 경우도 드물다. 발사된 흔적이 남은 총을 다 모으려면 무기고가 따로 필요할 지경이다. 이 일에 가담한 자들이 그만큼 국민 무서운 줄을 몰랐거나, 제정신이 아니었거나, 둘 다일 수 있다는 얘기다. 닉슨을 사임으로 몰아간 '깊은 목구멍'의 정체는 33년 동안이나 베일에 가려 있었으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내부자의 입은 너무나 쉽게 열려 맥이 빠진다. 저들 사이에서는 조폭만큼의 알량한 의리마저 발견할 길이 없다.

  ~ 중략 ~

  개 꼬리 3년 묻어둔다고 노루 꼬리 되지 않는다고 했던가. 재벌들이 미르재단이나 K스포츠재단에 앞다퉈 뇌물을 바쳤다는 소식을 듣고는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활동한 경제학자인 헨리 조지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토지에 중과세를 하지 않으면 사회 불평등을 잡을 수 없다는 토지공개념의 창시자인 헨리 조지가 100년도 더 전에 한 말을 내 나름으로 소화해서 간추려보면 이렇다.

    막대한 부를 가진 자들은 집권당이 아무리 부패해도 항상 지지한다.
    부자들은 본능적으로 변화를 두려워해서 개혁을 위해 노력하는 법이 없다.
    잘못된 통치에 대항해 투쟁하지도 않는다.
    정치권력으로부터 위협을 받더라도 대항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호소하지도 않는다.
    대신 권력자들을 매수해버린다.
    정부가 부패하면 할수록 부자들이 이용해먹기는 점점 쉬워진다.

 ~ 중략 ~

  헨리 조지에 따르면 경제 정의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다. 극도로 돈이 많은 사람과 극도로 돈이 없는 사람만으로 이루어진 사회는 권력을 잡은 이의 손쉬운 먹잇감으로 전락한다. 그는 극단적으로 '노예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은 노예 주인에게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표현을 쓴다. 한 나라에서 빈부격차가 커지는 것을 방치하면 보통선거는 부자의 정치적 영향력만 강화할 뿐이라는 뜻에서다. 사람들은 현실에 신물이 나서 신선한 인물이나 당을 찾지만 결국 소속만 바뀐 동일한 자들을 뽑고 절망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경고한다.

 ~ 중략 ~

  사람들은 흔히 사회적 사건 뒤에는 반드시 경제 문제가 도사린다는 점을 간과한다. 51.6%의 유권자가 미친 짓만 하지 않았다면 오늘과 같은 일은 없었으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국민이 빈부격차를 좁히고 경제 정의를 다시 세우겠다는 기본 합의를 이루지 못한다면 우리는 더한 봉변도 당할 수 있다. 미국 유권자가 마치 '화염병을 던지는 심정으로' 트럼프를 찍은 것도 빈부격차와 관련이 깊다. 최순실 일가는 난장판이 된 경제를 손보지 않으면 로봇만이 아니라 깡패도 대통령에 당선할 수 있다고 소리 지르는, 연기 나는 기관총이자 대포이다.

< 시사인 2016.11.26 문정우의 활자의 영토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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