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기안착, 전선묻기, 방문달기, 외부미장(1차).. 완공이 눈앞에 보인다. 흙부대 집짓기


아 이것이 얼마만의 흙부대 집짓기 글쓰기인가.. 
이제 오랜만이라는 말은 쓰지 않겠다.
아래 변기 놓았던게 4월이었던 거 같지만... 

변기 놓을때에는 밑부분에 백시멘트를 뻑뻑하게 반죽해서 붙여주면 된다고 하던데, 
한번도 안해본 작업이었지만 화장실 타일 미장해주시던 사장님 어깨너머로 본 기억을 되살려 해보니 
비슷하게 되기는 한다.. 
나중에 지차목수형님에게 보여드리니 약간 두껍다고는 하시던데 ㅋ   
어쨌든 변기안착 클리어.


다음은 집 내부의 전선과 인터넷 선을 합쳐서 밖으로 나오는 선을 전신주와 연결하기 위해서 땅을 파고 있는 모습이다.
공중으로 연결하는 것 보다는 땅속이 낫다고 해서..  삽으로도 열심히 파고.. 포크레인으로도 파고.. 해서 묻었다. 
땅 파는 것 못지않게 선들을 통합해서 주름관에 넣는 작업도 꽤 힘이 들었음.. 
(전기 사장님이랑 나랑 둘이서 영차영차..)


창문틀에 창문을 넣고나서는 아래와 같이 창문 옆에 나무를 덧대어 주고 이지씰 이라는 방수테이프를 붙여줘야 한다.
붙이고 나서 약간 널찍한 나무를 붙여줘야 보기가 좋다고 함.. 
(널찍한 나무 붙어있는 모습은 더 아래 사진에서 참조)  
사진에서는 창문의 하단 부분에만 이지씰이 붙어있는 모습.


아래 사진은 이 즈음의 집 모습..  아직 박공벽을 붙이지 않았음.


아래 사진은 이제 박공벽도 데크재로 붙이고, 화장실 외벽(현관문 옆)도 동일하게 데크재로 마감한 모습.. 
원래 화장실 외벽은 황토로 마감할 계획이었으나 데크재로 마감하는 것도 괜찮을 거 같아서 이렇게 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보기 좋은듯 하다.  


이제 실내 방문도 달고.. 


천정 등도 달고.. LED로 인터넷 구매하니 생각보다 많이 저렴한 것 같다.


화장실 천정은 삼목 루바로 마감했다. 
편백나무보다는 약간 저렴하면서도 나무향기도 괜찮은듯.. 
물에도 강하다고 한다. 


초여름에 지붕 트러스 밑부분에 인슐레이션 넣다가 죽는 줄 알았음.. 
더워지기 전에 빨리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미루고 있다가 결국에는 그나마 덜 더운 날에 하긴 했으나...
방진복 입고 마스크 쓰고 지붕 안에 들어가서 유리섬유가루 뒤집어쓰면서 작업하려니.. 
참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어떻게 그걸 나혼자 다 붙였나 싶기도 하고.. ㅋ  


여름에는 일하다 죽을수도 있다는 생각에 일을 하지 않았고... (정말 하고 싶은 생각이 1도 들지 않았음)
여름 지나고 나서 1차 외부미장을 하고있는 사진..
그나마 볕이 덜 드는 서쪽과 남쪽을 먼저했고, 아래 사진은 남쪽과 동쪽면임.

이번에도 이모, 이모부, 이모 교회분들 세 분 정도와 지차형님, 형수님 오셔서 
이틀동안 도와주시니 힘 덜 들이고 1차미장을 끝낼 수 있었다. 
나 혼자 하려니 하루에 2평방미터도 진도 나가기 힘들던데..
정말 고마운 분들이다.. 다음에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꼭 도와드려야지.. 


어떻게 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결국 아래 사진까지는 왔다. 
이제 마무리만 조금 더 하면 완공(?)될 수 있을 듯.. 
진정한 완공은 몇 년 더 있어야 할 지도 모르겠만.. ㅋ 

여기까지 온다고 수고하셨습니다.. 라는 말을 나한테 해주고 싶다. 그리고 도와주신 모든 분들에게도. 


알랭 드 보통의 <불안> Book World

실로 오래간만에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 같다. 
(이 블로그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말이 '오래간만에' 인 것 같은 느낌이..)

7월부터는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적 여건이 주어져서(?) 조금씩 읽고 있는데, 
책을 읽고 난 후 글로 정리하는 것은 아직 좀 버겁게 느껴진다.
이러니 지금도 읽은 책은 몇 권 더 있는데 정리가 안되어서 책상 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어쨌든 그 중에서도 가장 위에 있던 책이 <불안>이라서.. 먼저 글을 써 본다.

근래 들어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가끔씩 엄습해 오길래, 
몇년 전 불안에 떨 때 사서 조금 읽다가 말았던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다시 집어들었다. 

TED 강연에서 보았던 알랭 드 보통의 명쾌하고 유머러스한 모습에 호감을 느꼈던 것인지..
왠지 책을 읽으면 더 불안해 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일단 샀었다.. 

책은 흡사 논문과도 비슷한 느낌으로, 
지위와 지위로 인한 불안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불안의 원인과 그 해법에 대해서 차례대로 서술해 나간다. 

원인으로는 사랑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을 들고있고, 
해법으로는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의 순으로 설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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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 사랑결핍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날 때부터 자신의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괴로워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하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느낌은 함께 사는 사람들의 판단에 좌우된다. 
  이상적인 세계에서라면 이런 식으로 남들의 반응에 좌우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나라는 사람에 대하여 아주 다양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 내가 똑똑하다는 증거도 댈 수 있고 바보라는 증거도 댈 수 있으며, 익살맞다는 증거도 댈 수 있고 따분하다는 증거도 댈 수 있으며, 중요한 인물이라는 증거도 댈 수 있고 있으나마나 한 존재라는 증거도 댈 수 있다. 이렇게 흔들린다면 사회의 태도가 우리의 의미를 결정하기 마련이다. 무시를 당하면 속에 똬리를 틀고있던 자신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고개를 쳐들며, 미소나 칭찬과 마주치면 어느새 역전이 이루어진다. 혹시 남의 애정 덕분에 우리 자신을 견디고 사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에고'나 자아상은 바람이 새는 풍선과 같아, 늘 외부의 사랑이라는 헬륨을 집어넣어 주어야 하고, 무시라는 아주 작은 바늘에 취약하기 짝이 없다. 
  따라서 물직적인 관점만이 아니라 정서적인 관점에서도 우리가 세상에서 차지하는 자리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 자리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 결정하며, 결과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좋아할 수 있느지 아니면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을 수밖에 없는지 결정한다. 이 자리는 우리에게 전례 없는 중요성을 가지게 된 일용품, 즉 사랑을 얻는 열쇠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자신의 인격을 신뢰할 수도 없고 그 인격을 따라 살 수도 없다. 

 
원인 - 속물근성

  어렸을 때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아무도 크게 마음을 쓰지 않으며,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 무조건적인 애정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어른이 된다는 것은 냉담한 인물들, 속물들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우리 자리는 차지한다는 의미이다. 
  속물의 독특한 특징은 단순히 차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인간의 가치를 똑같이 본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다 보면 결국은 두려움이 모든 일의 근원이라는 느낌이 든다. 자신의 자리에 확신을 가지는 사람은 남들을 경시하는 것을 소일거리로 삼지 않는다. 오만 뒤에는 공포가 숨어 있다. 괴로운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만이 남에게 당신은 나를 상대할 만한 인물이 못 된다는 느낌을 심어주려고 기를 쓴다. 
  두려움은 세대를 따라 전해진다. 나이든 세대는 낮은 계급에 속하는 것이 곧 재앙이라는 자신의 고정 관념을 젊은 세대에게 물려준다. 자신의 후손이 낮은 지위(자신의 낮은 지위와 남들의 낮은 지위)가 곧 무가치한 존재로 연결되지는 않고, 또 높은 지위가 곧 훌륭한 존재로 연결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며 내적인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감정적 토대를 박탈해버리는 것이다. 
  "스파이서 윌콕스 집안사람들이 가네요, 엄마!" 1892년 <펀치>에 실린 만화에서 봄날 아침에 하이드 파크를 걷던 딸은 어머니에게 소리친다. "우리와 사귀고 싶어 죽을 지경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부르는 게 좋을까요?"
  "안 되지, 얘야." 어미니가 대답한다. "우리가 사귀고 싶어 죽을 지경인 사람들은 우리가 사귈 만한 사람들이 아니야. 우리가 사귈 만한 사람들은 오직 우리과 사귀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뿐이란다!"


원인 - 기대

  서양문명 2,000년의 장점은 이제 익숙하다. 무엇보다도 부, 식량, 과학 지식, 소비 물자, 신체적 안전, 기대 수명, 경제적 기회 등이 증가했다는 사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상적인 물질적 발전이 닉슨의 소비에트 연설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현상을 수반한다는 곤혹스러운 사실은 그렇게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 현상이란 서구의 보통 시민에게 지위로 인한 불안의 수준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즉 자리, 성취, 수입을 놓고 걱정이 늘어났다는 뜻이다. 
  실제적 궁핍은 급격하게 줄어들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궁핍감과 궁핍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고 외려 늘어나기까지 했다. 중세 유럽에서 변덕스러운 땅을 경작하던 조상은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할 부와 가능성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놀랍게도 자신이 모자란 존재이고 자신의 소유도 충분치 못하다는 느낌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이 충분하다고 판단하는 심리를 생각해보면 이런 박탈감도 그렇게 이상할 것은 없다. 어떤 것 - 예를 들어 부나 존중 - 의 적절한 수준은 결코 독립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준거집단, 즉 우리와 같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조건과 우리의 조건을 비교하여 결정된다. 
  데이비드 흄은 <인성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질투심을 일으키는 것을 우리와 다른 사람들 사이의 커다란 불균형이 아니라 오히려 근접 상태다. 불균형이 심하면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며, 그 결과 우리에게서 먼 것과 우리 자신을 비교하지 않게 되거나 그런 비교의 결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사회 구성원에게 무제한의 기대를 갖게 하는 사회에서 생기는 문제를 심리적인 각도에서 탐사한 사람은 미국인 윌리엄 제임스였다. 
  "시도가 없으면 실패도 없고, 실패가 없으면 수모도 없다. 따라서 이 세계에서 자존심은 전적으로 자신이 무엇이 되도록 또 무슨 일을 하도록 스스로를 밀어붙이느냐에 달려 있다. 이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자기 자신의 잠재력에 대한 실제 성취 비율에 의해 결정된다. 자존심 = 이룬 것 / 내세운 것"
  제임스의 방정식은 우리의 기대 수준이 높아지면 수모를 당할 위험도 높아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장-자크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1754)에서 다들 야만인과 근대의 노동자 가운데 노동자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과연 정말일까 하고 물었다. 
  루소의 주장은 부에 대한 명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루소에 따르면 부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 
  
  우리는 조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 그 대가는 우리가 현재의 모습과 달라질 수 있는데도 실제는 달라지지 못하는 데서 오는 끊임없는 불안이다. 


원인 - 능력주의

  사회진화론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고난과 이른 죽음이 사회 전체에 유익하며, 따라서 정부가 개입해서 막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약자는 자연의 실수이며, 재생산을 하여 나머지 사람들을 오염시키기 전에 소멸하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동물의 왕국이 기형으로 태어난 짐승을 포기하듯이, 인간 세계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짓밣힌 자는 자비를 베풀지 말고 죽게 놔두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친절한 행동이었다. 
  영국의 사회진화론자 허버트 스펜서는 <사회 통계학>(1851)에서 생물학적 원리 자체가 자비라는 개념과는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재계와 언론을 지배하던 자수성가한 금권주의자들 가운데는 스펜서의 교의를 적극적으로 환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이클 영은 <능력주의의 등장>(1958)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아무리 비천하다 해도 자신에게 모든 기회가 열려 있음을 안다. (...) 만일 되풀이하여 '바보'라는 낙인이 찍히면 허세를 부릴 수가 없다. (...) 이제는 자신이 열등한 지위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지 않을까? 과거와는 달리 기회를 박탈당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열등하기 때문에 말이다."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진다. 


원인 - 불확실성

  불안은 현대의 야망의 하녀다. 생계를 유지하고 남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려면 적어도 다섯 가지 예측 불가능한 요인이 뜻대로 따라주어야 하는데, 이것을 사회적 위계 내에서 자신이 바라는 자리를 얻거나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하는 다섯 가지 이유가 되기도 한다. 

1.변덕스러운 재능

2.운
  우리의 지위는 '운'이라는 말로 느슨하게 얽어 넣을 수 있는 어떤 범위의 우호적 조건들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환경의 움직임을 통제하고 예측하는 인간의 힘이 성장하면서 운이나 수호신이라는 관념은 힘을 잃었다. 이 맥락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을 패배를 불운 탓으로 돌리는 것이 궁색해 보인다는 점이다. 승자는 운을 만든다. 이것이 현대의 주문이다.
  우리의 지위의 문제를 우연적 요소에 맡긴다는 것은 불안한 일이다. 그러나 합리적 통제라는 관념에 완전히 물들어, '불운'이 실패를 설명하는 그럴듯한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관념을 폐기해버린 세상에 산다는 것은 더 힘든 일이다. 

3. 고용주
  삶의 조건의 예측 불가능성은 우리의 지위 문제가 고용주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더욱 심각해진다. 
  피고용자가 되는 고통에는 고용 기간의 불확실성만 아니라 수많은 작업 관행과 역학에서 오는 모욕감도 포함된다. 조직의 피라미드를 성공적으로 기어 올라가는 등반가는 자신이 맡은 일에서 최고라기보다는, 문명화된 삶에서는 지침을 얻기 힘든 여러 가지 음침한 정치적 기술에 가장 숙달된 사람들이다. 
  근대의 사업체와 궁전은 겉으로 보기에는 차이가 많다. 그러나 15세기에서 17세기까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궁정에서 생활했던 명민한 귀족들의 글을 읽어보면 근대의 사업체에서 생존하는 비결을 터득하는 데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들이 쓴 글들은 노동자들이 출세를 하려고 할 때 공식적인 정규적 역할 외에 어떤 책략을 구사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세상은 장점 자체보다는 장점의 표시에 보답을 하는 경우가 더 많다." - 라로슈푸코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다. 사랑은 감사의 유대에 의해 유지되지만, 사람은 지나치게 이해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유리한 기회가 생기기만 하면 이 유대를 끊어버린다. 그러나 공포는 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유지되며 이것을 늘 효과적이다." - 마키아밸리
"다수는 착하지도 않고 지혜롭지도 않으므로, 친절보다는 엄격함에 의지해야 한다." - 구이차르디니

4. 고용주의 이익
  고용의 안정성은 조직 내의 정치만이 아니라 회사가 시장에서 계속 이윤을 내는 능력에도 달려 있다. 
  역사의 오랜 기간 동안 물자와 용역의 수명은 그것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인간의 수명보다 길었다. 그러나 제품 수명은 19세기 중반부터 급속하게 짧아져, 자신이 하는 일이 장기간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는 일꾼의 신념도 무너졌다. 
  새로운 제품과 용역의 손에 낡은 것이 금방 밀려나는 현상은 경제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난다. 

5. 세계 경제
  회사와 종업원들의 생존은 경제 전체의 성적 때문에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기도 한다. 

  마르크스는 칸트를 참조하여 부르주아지와 그들의 새로운 과학인 경제학이 대규모로 "부도덕"을 자행한다고 비난했다. "(경제학은) 노동자를 오직 일하는 동물로만 본다. 가장 기본적인 신체적 요구만 남은 짐승으로 여기는 것이다."
  투입 [원료 + 노동 + 기계] = 산출 [제품 + 이윤]
  모든 상업조직은 원료, 노동, 기계를 가장 싼 값에 모은 다음 그것을 결합하여 제품을 만들어 가능한 가장 높은 값으로 팔려고 한다. 경제적 관점에서 보자면 방정식의 투입 부분에 들어가는 요소 사이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모두가 상품이며, 합리적인 조직은 이윤을 내기 위해 이들을 값싸게 구하여 능률적으로 처리하려 할 것이다. 
  그럼에도 곤혹스럽게도 "노동"과 다른 요소들 사이에는 한 가지 차이가 있다. 재래 경제학에는 이 점을 표현할 또는 중시할 수단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이것을 세상에 불가피하게 존재하는 차이다. 즉 노동자는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다. 

  고용의 불안정이 문제가 되는 것은 돈 때문만은 아니다. 다시 처음 이야기한 주제로 돌아가 본다면 그것을 사랑 때문이기도 하다. 다른 무엇보다도 일을 기준으로 남들이 우리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느냐 하는 질문에 우리가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우리를 대접하는 방식을 결정한다. 이것을 우리가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맨 처음에 대답해야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해법 - 철학


명예와 약점

명예의 문제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눈으로 바라볼지 모르지만, 그러는 우리도 그런 사람들의 정신구조의 가장 중요한 측면을 공유하고 있을지 모른다. 다른 사람들의 경멸에 매우 약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자존심 역시 다른 사람들이 부여하는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서 우리도 성질 급하게 나서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을지 모른다. 결투란 지위의 문제에 대한 보편적인 예민한 감정적 대응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 이제는 다행스럽게도 과거가 되어버린 역사적 사례일 뿐이다. 
  무엇이 중요한가를 판단하려고 할 때, 다른 사람들로부터 우호적인 시선을 받고 싶은 강렬한 요구는 과거와 다름없이 우리 생각을 지배한다. 스페인어로 데스온라도deshonrado - '불명예를 당한 자'라는 뜻이지만 그 현대적인 함의는 섬뜩할 정도로 강한 경멸이 담긴 말인 '패배자'로 담아낼 수 있을 것이다 - 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칼데론이나 로페 데 베가의 비극에 나오는 인물들만이 아니라 우리도 괴롭힐 수 있다. 


철학과 약점의 극복

기원전 5세기초, 그리스 철학자들은 남들이 우리를 보는 눈으로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모욕은 근거가 있든 없든 우리에게 수치를 준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철학은 외부의 의견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새로운 요소를 도입한다. 상자를 하나 떠올리면 좋을 것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다른 사람들의 인식은 모두 이 상자에 먼저 들어가서 평가를 받아야 한다. 만일 그것이 참이면 더 강한 힘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만일 거짓이면, 웃음을 터뜨리거나 어깨를 으쓱하고 털어버리는 것으로 우리에게 아무런 해도 주지 못하고 사라져버린다. 철학자들은 이 상자를 '이성'이라고 불렀다. 
  철학자들은 우리의 지위가 장터의 감정이나 변덕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지적인 양심에 의지하여 안정을 얻을 수 있는데, 이것을 이성 덕분이라고 보았다. 이성적으로 검토해보았을 때 공동체로부터 불공정한 대접을 받은 것이라면 공동체의 판단에 흔들릴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로마 제국이라는 불안정한 세계에서 살아가던 황제이자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167)에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성품이나 업적에 대하여 하는 말 때문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되며, 먼저 이성으로 그런 말을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품위는) 다른 사람의 증언에 좌우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의 비난이나 질책이 무조건 근거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가치 평가를 지적인 양심에 맡기는 것은 무조건적 사랑을 기대하는 것과는 다르다. 
마찬가지로 철학은 불안도 종류에 따라 쓸모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불안 때문에 잠 못 이루며 성공을 거둔 불면증 환자들이 오래전부터 강조해왔듯이 생존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불안에 떠는 사람일 수도 있다. 
  불안 덕분에 안전을 도모하기도 하고 능력을 계발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한다면, 이런 점과 관련하여 다른 감정들의 쓸모도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상태가 되거나 어떤 것을 소유하면 불행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그런 상태나 소유를 선망할 수 있다. 이렇게 감정은 과녁을 넘어가거나 못 미치기 십상이기 때문에, 철학자들은 이성을 사용하여 감정을 적절한 목표로 이끌라고 충고해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 진정으로 무서워할 만한 것인지 자문해보라는 것이다. 


지적인 염세주의

철학자들은 오래전부터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면밀하게 검토해보면 서글픈 동시에 묘하게 위안이 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고 이야기해왔다. 어떤 문제이든 다수의 의견에는 혼란과 오류가 가득하다는 것이었다. 샹포르는 그의 이전과 이후의 여러 세대의 철학자들의 염세적 태도를 반영하여 이 점을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했다. "여론은 모든 의견 가운데 최악의 의견이다."
  이렇게 여론에 결함이 있는 것은 공중이 이성으로 자신의 생각을 엄격하게 검토하지 않고, 직관, 감정, 관습에 의존해버리기 때문이다. 
여론의 빈곤을 인정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일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이 깨달음은 지위로 인한 우리의 불안, 다른 사람들에게 훌륭하게 보이고 싶은 피곤한 욕망, 사랑의 표시를 보고 싶어 안달하는 갈망을 다독이는 데 도움이 된다. 
  철학적인 접근방법의 장점은 심리적인 면에서 드러난다. 누가 우리에게 반대하거나 우리를 무시할 때마다 상처를 입는 대신 먼저 그 사람의 그런 행동이 정당한지 검토해보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의 인정을 바라며 자학하는 습관을 버리고 그들의 의견이 과연 귀를 기울일 만한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사랑을 구하는 사람들의 정신에 존경할 만한 구석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도 있다. 
이렇게 인간성을 통찰력 있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유용하기는 하지만, 한 가지 불리한 점은 이런 관점을 따를 경우 친구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함께 모여 연구를 한 것도 아닌데 입을 모아 외부의 인정이나 비난의 표시보다는 우리 내부의 양심을 따르라고 권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무작위 집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해법 - 예술


예술과 속물근성

소설은 감추어진 삶의 목격자이기 때문에 지배적인 위계 관념에 상상의 평형추 역할을 할 수 있다. 소설에서는 점심 준비로 바쁜 하녀가 보기 드문 감수성과 도덕적 위엄의 소유자인 반면, 시끄럽게 웃음을 터뜨리는 은광 소유자 남작의 마음은 시들고 역겨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교훈을 잊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들 내면의 가장 좋은 부분이 우리의 관심을 끌 만한 외적인 성취로 표현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지 엘리엇은 <미들마치>(1872)의 서두에서 눈에 보이는 분명한 공적만을 존중하는 이런 경향을 언급하면서, 그녀의 여주인공의 지위와 아빌라의 성 테레사(1512~1582)의 지위를 비교하는, 언뜻 무모해 보이는 일을 감행한다. 엘리엇의 말에 따르면 성 테레사는 행운과 환경 덕분에, 즉 부유하고 인맥이 좋은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행동으로 자신의 선과 창조성을 실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지 앨리엇은 계속해서 이 스페인의 성자만큼 똑똑하고 창조적이지만 자신의 잘못과 불리한 사회적 조건 때문에 위대한 행동으로 자신의 특질을 표현하지 못한 사람, 따라서 내적 자아와 비례하지 않는 지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도 세상에는 많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영웅적인 삶을 살지 못한 수많은 테레사가 이 땅에 태어났다. 그들은 잘못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으며, 이것은 영적인 숭고함이 이에 부응하지 못하는 빈약한 기회를 만나 빚어낸 결과다."
  이 소설에서 앨리엇은 "영적인 숭고함"이라도 "오랫동안 인정받은 행위"와 연결되지 않으면 무시해버리는 세상의 습관을 비판한다. 
  앨리엇은 도로시아가 비록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결혼을 했고 눈에 띄게 이루어놓은 일이 없기는 하지만, 가정에서 우회적인 방식으로 드러난 그녀의 인격이 아빌라의 성 테레사 못지않게 성스럽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비극

비극을 본 관객은 훌륭한 삶을 살아가는 일의 어려운 앞에서 슬픔을 느끼고, 그 일에서 실패한 사람들 앞에서 겸손해진다. 
우리가 비극 작품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실패에 평소보다 훨씬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것은 그 작품을 통해 실패의 유래를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더 많이 아는 것은 곧 더 많이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다. 
비극은 실패나 패배에 대한 단순화된 관점을 버리게 하고, 우리 본성의 풍토병과 같은 우둔과 일탈을 너그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한다. 
  사람들이 비극 예술에 담긴 교훈을 받아들인 세계에서는 실패의 결과가 우리를 그렇게 심하게 짓누르지 않을 것이다. 


희극

유머는 불만을 제기하는 데 특별히 효과적인 방법이다. 겉으로는 즐거움만 주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은근히 교훈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해법 - 정치


현대의 지위 불안에 대한 정치적 관점

  근대의 이상 가운데 그것이 설정해놓은 부와 미덕의 연결, 뒤집어 말하면 가난과 미덥지 않은 태도의 연결만큼 정밀한 조사를 받은 측면도 없다. 소스틴 배블런은 <유한계급론>(1899)에서 19세기 초에 돈이 상업적 사회가 그 구성원을 평가하는 중심 기준으로 등장했다고 묘사했다. "(부는) 존중의 관습적 기초가 되었다. 공동체에서 존경받을 만한 자리를 차지하려면 돈이 필수적이었다. 평판을 유지하려면 재산을 획득하는 것이 불가결하게 되었다. (...) (상대적으로 높은) 부의 기준에 미달하는 공동체 구성원은 다른 사람들의 존중을 받기 어려우며, 그 결과 자기 자신의 존중도 받기 어렵다."
  스미스의 시대 이후로 경제학자들은 궁핍한 상태를 규정하고 그것을 속상한 일로 만드는 것은 직접적인 신체적 고통이라기보다는 그 상태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부정적 반응에서 나오는 수치감, 즉 가난 때문에 스미스가 말하는 "기존의 품위 유지 규칙"을 지키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수치감이라는 데 거의 만장일치로 동의하고 있다. 

  몽테뉴는 힘 있고 부유한 자를 만날 때 흥분을 억제하고 가난하고 미미한 자를 만날 때 판단을 억제할 것을 요구했다. 상업적인 능력주의의 이상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 제기에서는 공통적으로 돈처럼 우연하게 분배되는 것에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는 호소를 읽을 수 있다. 부와 미덕을 교조적으로 연결시키는 관행을 중단하고, 사람을 판단을 하기 전에 반드시 죽마를 떼어내라는 것이다. 

  근대의 성공적 삶이라는 이상은 돈과 선을 연결시킬 뿐 아니라, 또 하나의 연결도 시도한다. 즉 돈과 행복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과학기술에서 뒤졌던 선사시대에는 인간이 루소가 말하는 자연 상태에서 살았는데, 루소는 이 시기에는 사람들이 자신을 더 쉽게 이해했으며, 만족스러운 삶의 핵심적인 특징을 쉽게 파악할 우 있었다고 상상한다. 
  이것을 터무니없는 낭만적인 이야기로 해석하여 근대성에 비합리적인 분노를 느낀 전원주의자의 공상이라고 분석해버릴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18세기 사람들이 주장에 귀를 기울였던 것은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서 그 주장의 참된 면모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점을 덧붙여두어야겠다. 16세기 미국 인디언 사회에 대한 보고서들은 이들이 물질적으로는 소박하지만 심리적으로는 보람있는 생활을 한다고 묘사했다. 

어떤 것을 소유하고 나서 얼마 후에는 그것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불안을 극복하거나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노력은 하더라도 우리의 목표들이 약속하는 수준의 불안 해소와 평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선망을 멈추지 못한다면, 엉뚱한 것을 선망하느라 우리 삶의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비할 것인가.


정치적 변화

처음에는 독특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관념들은 많이 있다. 
"처음부터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도록 정해졌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은 우리가 바꿀 권리도 능력도 없는 영원한 신의 뜻이다." - 퍼시백작(1873)
"한 인종으로 볼 때 아프리카인은 백인보다 열등하다. 따라서 흑인은 백인에게 종속되는 것이 정상이다. 따라서 아프리카인을 열등하게 여기는 우리의 체제는 자연의 위대한 법칙에 근거하고 있다." - 알렉산더 스티븐스(1861)

사회의 목소리 큰 사람들이 선험적 진리로 여기는 견해들이 사실은 상대적인 것이고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비로소 정치적 의식이 깨어난다. 그런 견해들은 자신만만하게 주창될 수도 있고, 나무나 하늘처럼 존재의 기본 구조에 속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 어떤 정치적 관점에 따르면 - 특정한 사람이 특정한 현실적 또는 심리적 이해관계를 옹호하고자 만든 것이다. 
  이런 상대성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그것은 지배적인 믿음들이 자신은 태양의 궤도처럼 인간의 손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공들여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자명한 것을 이야기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카를 마르크스의 유명한 표현을 빌리자면, 그런 믿음들은 이데올로기다. 이데올로기적 진술이란 중립적으로 말하는 척하면서 교묘하게 어떤 편파적인 노선을 밀어붙이는 진술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시대의 지배적 관념은 늘 지배계급의 관념이다."
그러나 이런 관념들은 강압적으로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면 결코 지배를 할 수가 없다. 이데올로기적인 진술의 핵심은 높은 수준의 정치적 감각이 없으면 그 편파성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무색무취의 가스처럼 사회에 방출된다. 

억압적 상황은 영원한 고통을 겪으라는 자연의 심판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변화 가능한 어떤 사회 세력들 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죄책감과 수치감은 이해로, 지위의 더 평등한 분배 방식에 대한 탐구로 바뀔 수도 있다. 

관념이나 제도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할 때는 고통의 책임을 아무에게도 묻지 못하거나 고통을 겪은 당사자에게 묻게 된다. 그러나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아니라 관념이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상상하게 된다. 
정치적 관점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해다. 
신문과 텔레비전에 주입되어 있는 물질주의, 기업가 정신, 능력주의에 대한 열망은 체제의 키를 쥐고 있는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한다. ("모든 시대의 지배적 관념은 늘 지배계급의 관념이다"). 그리고 다수는 이 체제에 의해 생계를 유지한다. 
  이렇게 이해한다고 해서 지위와 관련된 이상 때문에 생기는 불편이 기적적으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정치적 어려움을 이해하는 것은 기후 위성으로 기상 상태의 위기를 파악하는 것과 같다. 그것이 늘 문제를 막아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거기에 접근하는 최선의 방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유용한 것을 가르쳐준다. 


해법 - 기독교


죽음

톨스토이는 죽음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을 살핀 기록인 <참회록>(1882)에서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로 세계적인 명성과 부를 얻은 뒤인 쉰한 살 때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가치나 신의 가치를 따라 산 것이 아니라 "사회"의 가치를 따라 살았으며, 이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강해지고, 유명해지고, 중요해지고, 부유해지고자 하는 불안한 욕망을 품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죽음을 생각하자 이전의 야망들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의심이 생겼다. 
이것은 죽음에 대한 생각이 삶의 더 진정한, 더 의미 있는 길의 안내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다. 

조건부 사랑에 흥미를 잃게 되면, 그것을 얻기 위해 우리가 추구하던 많은 것들에 대한 흥미도 줄어든다. 부, 위신, 권력으로는 우리의 지위가 유지되는 한에서만 지속되는 사랑밖에 얻을 수 없다면, 그렇게 살다가는 어린 아이처럼 위로를 갈망하며 무방비 상태에서 헝클어진 모습으로 인생을 끝내야 할 운명이라면, 우리가 지위를 얻든 잃든 지속될 수 있는 관계에 에너지를 집중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생기는 셈이다. 

우리 자신의 소멸을 생각하다 보면 우리가 마음속으로 귀중하게 여기는 생활방식을 향해 눈길을 돌리게 된다. 

폐허는 세속적 권력이라는 불안정한 보답을 얻으려고 마음의 평화를 포기하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말한다. 
  폐허는 우리의 노력을, 완전과 완성이라는 이미지를 버리라고 한다. 폐허는 우리가 시간에 도전할 수 없다는 사실, 우리는 파괴의 힘의 장난감일 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우리는 우리의 이상 때문에 괴로워하며,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중요성을 너무 크게 생각하기 때문에 괴로워한다. 

광대한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사회적 위계 내에서 우리가 하찮다는 느낌은 모든 인간이 우주 안에서 하찮다는 느낌 안에 포섭되면서 마음에 위로를 얻게 된다. 
  우리 자신이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느낌은 우리 자신을 더 중요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 


공동체

우리의 약점에는 늘 두 가지 요소가 있다. 공포와 사랑에 대한 욕망이다. 
  예수는 동료애를 장려하기 위해 어린 아이를 보듯이 어른을 보라고 촉구했다. 

기독교의 주장에 따르면 낯선 사람이란 없다. 다른 사람이 우리와 같은 요구와 약점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낯설다는 인상만 있을 뿐이다. 우리가 중요한 부분에서는 근본적으로 다른 모든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는 인식이야말로 가장 고귀하고, 인간적인 깨달음이다. 

모든 인간이 귀중하다는 인식을 회복할 수 있을 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그런 인식을 유지할 수 있는 공간과 태도를 조성할 수 있을 때, 사람들은 평범한 삶을 어둡게 보지 않는다. 


해법 - 보헤미아

1845년 7월, 19세기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보헤미안 가운데 한 사람인 헨리 소로는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 시 근처 월든 호수의 북쪽에 자신의 손으로 지은 통나무집으로 이사했다. 그의 목표는 외적으로는 평범하지만 내적으로는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부르주아지에게 물질적으로는 빈약하더라도 심리적으로는 풍족한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소로는 한 사람에게 돈이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재규정하려고 했다. 그것은 부르주아적인 관점이 미묘하게 암시하는 것과는 달리, 반드시 인생의 게임에서 패했다는 뜻은 아니다. 돈이 없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에너지를 사업 말고 다른 활동에 쏟는 쪽을 택했고, 그 과정에서 현금이 아닌 다른 것에서 부유해졌다는 뜻일 수도 있다. 

주류 문화와 갈등하면서도 자신 있게 살아가려면 우리의 직접적인 환경에서 작동하는 가치 체계, 우리가 사교적으로 어울리는 사람들, 우리가 읽고 듣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보헤미안들의 통찰이다. 그래서 보헤미안들은 함께 시간을 보낼 사람을 고르는 데 특히 주의를 기울였다. 보헤미안들은 대도시에 살면서 지위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피하고 대신 진정한 친구들과 매일 접촉할 수 있는 동네에 모여 살았다. 

많은 보헤미안들이 영적인 관심을 삶의 전면에 내세우는 데 몰두한 나머지 실제적인 문제를 태만히 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생존할 만한 일을 찾는 데 안간힘을 써야 했으며, 이렇게 되자 영을 생각할 시간은 줄어들고 몸 생각을 해야 하는 시간은 늘어났다. 심지어 물질주의적이라고 욕하던 바쁜 판사나 약사보다 나을 것이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는 지위의 위계를 없애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수의 가치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가치, 다수의 가치를 비판하는 새로운 가치에 기초하여 새로운 위계를 세우려 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각 세대마다 높은 지위에 대한 지배적인 관념들을 충실하게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따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럼에도 패자나 이름 없는 사람이라는 잔인한 규정과는 다른 규정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정당성을 얻는 데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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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만 하는 것도 힘들군... 이틀 걸렸다.. 

불안에 대해서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는데.. 
극복이 안될래야 안될 수가 없을 것 같다. 

내가 어떤 틀에 갇혀서 불안을 느꼈는지 정확히 분석할 수는 없었지만,
대략적으로는 볼드체로 강조한 구절이 내가 많이 공감했던 부분이다.   
저자의 설명에 공감하면서 내 생각을 정리하다보니 알 수 없던 불안감이 많이 사라진 것 같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사람이라면, 어쩌면 전혀 불안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한 번쯤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헨리 소로우가 유명한 보헤미안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은 약간 충격이었다. 
나는 보헤미안을 뭘로 알고 있었던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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